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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비정전"의 줄거리, 인물해석, 총평

by moonokstay 2025. 8. 22.

아비정전 영화 이미지
아비정전

1. 기본 정보

제목: 아비정전 (Days of Being Wild)

감독: 왕가위

출연: 장국영, 유덕화, 장만옥, 유가령, 장학우, 매염방

장르: 멜로, 로맨스, 드라마

개봉: 1990년 12월 (홍콩)

러닝타임: 94분

촬영: 크리스토퍼 도일

음악: 루드비히 고란손, 무디한 올드 팝 사운드

특징: 감각적인 영상미, 인물 중심의 심리묘사, 왕가위 스타일의 시작점

《아비정전》은 왕가위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과 장국영의 퇴폐적 매력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사랑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한 남자의 고독한 방황과 그 주변 인물들의 서글픈 관계가 도시의 몽환적 분위기 속에 녹아들며, 삶과 사랑이란 무엇인지 묻게 만듭니다.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미장센과 음악은 한 편의 시처럼 가슴에 남습니다.

2. 줄거리

1960년대 홍콩. 무더운 여름의 기운이 공기 중에 무겁게 내려앉은 어느 날, 한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오늘은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네가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을 기억하겠어.” 그가 말한 이 1분은 단지 시간의 조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공유한 기억의 시작이었습니다. 유디는 그렇게 수리진의 마음속에 들어왔고, 그녀는 그 순간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디는 붙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남자였습니다. 그는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했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는 서툴렀습니다. 아니, 두려워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뿌리를 모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디는 어릴 적부터 양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자신의 친어머니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채 성장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집착하면서도 냉정했고,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타인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수리진이 정성을 다해 다가갈수록 그는 더 멀어졌고, 마침내는 그녀를 떠났습니다. 상처받은 수리진은 힘겹게 일상을 이어가고, 그녀의 외로움은 밤늦은 전화 교환원 부스 안에 조용히 쌓여갔습니다.

그런 수리진을 늘 바라보는 또 다른 남자가 있었습니다. 경찰 서기인 차우. 그는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그녀를 향한 마음만은 누구보다 깊었습니다. 그는 수리진이 지친 날에 말없이 자리를 지켰고,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울 때도 옆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수리진은 여전히 유디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었고, 차우는 끝내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멀어집니다. 마치 말하지 못한 사랑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바래가듯이,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서서히 멀어져 갔습니다.

유디는 또 다른 여자, 미미와 엮이게 됩니다. 미미는 댄서로 일하며 유디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자유로운 성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그가 괴로워할 때 옆에 있었고, 그가 미간을 찌푸릴 때 등을 다독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 유디의 마음 깊은 곳까지는 닿지 못했습니다. 유디는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고독 속에 있었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많은 것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자신이 태어난 뿌리를 찾기 위해 필리핀 마닐라로 떠납니다. 거기엔 친어머니가 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만나기를 거부합니다. 유디는 호텔방에 홀로 누워 무너진 자아를 감당해야 했고, 그의 마지막은 그렇게 조용하게 닫혀갑니다.

이 영화에는 주인공이 많지만, 누구 하나도 완전한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사랑을 원하지만, 누구도 끝까지 품지 못합니다. 수리진은 유디를 잊지 못한 채 고요하게 무너졌고, 차우는 묵묵히 자신의 감정을 흘려보냈습니다. 미미는 유디를 따라 마닐라까지 갔지만, 결국 그와 만나지 못한 채 돌아섰고, 유디는 자신을 낳은 여인에게도 거부당한 채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왕가위 감독은 이 모든 사랑을 한 여름의 더위처럼 뿌옇고 흐리게 그려냅니다. 누구도 정답을 말하지 않고, 누구도 결말을 맺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침묵 속에서 끝이 납니다. 침실 한쪽 벽을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낯선 남자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는 조명이 꺼져가는 방 안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킵니다. 그의 존재는 관객에게 여러 해석을 남기지만, 어쩌면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한 사랑의 연결점이 아닐까 하는 여운을 남깁니다. 《아비정전》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영화라기보다는, 인물들의 감정과 눈빛, 그들이 걸어가는 거리의 공기를 함께 마시며 기억하는 영화입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사랑을 지나치게 가까이 들여다본 후, 그 감정의 잔향을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는 듯한 체험이었습니다.

3. 인물 해석 

(1) 유디 – 바람처럼 머물지 않는 남자

유디는 《아비정전》이라는 세계의 중심입니다. 그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무더운 공기처럼 선명하게 존재하지만, 끝내 누구의 손에도 잡히지 않는 남자였습니다. 장국영이 연기한 이 인물은 사랑받는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법은 끝내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쿨하고 시크한 태도가 있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어릴 적부터의 상처와 정체성의 혼란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는 양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이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생모에 대한 존재는 그에게 평생의 결핍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무언가를 갈망하면서도, 그 갈망을 붙잡지 못한 채 떠도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수리진을 좋아했지만, 오래 곁에 머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미미가 다가와도, 그녀의 헌신에 감동받기보다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고, 때로는 무심하게 밀어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유디가 애초에 누구도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결핍을 들여다보는 대신, 바깥으로 나아가는 데 집중했고, 새로운 관계와 공간으로 자신을 던지며 그 공허함을 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위로를 받지 못한 채, 결국은 혼자가 되었고, 마닐라의 한 호텔방에서 그는 인생에서 가장 조용한 고백과도 같은 침묵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유디는 그렇게 끝내 사랑을 주지 못한 남자였고, 그 누구보다 사랑이 절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2) 수리진 – 마음을 놓지 못한 채 남겨진 여자

수리진은 유디를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의 허세와 냉정함 너머에 숨어 있는 외로움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녀는 조용하고 차분했으며, 사랑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려 했습니다. 밤늦게까지 교환원으로 일하며 쌓아온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유디를 향한 애정만큼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알게 됩니다. 유디는 누구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녀는 쉽게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유디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남겨졌습니다. 유디는 떠났고, 그녀는 남아서 그가 남긴 흔적을 견뎌야 했습니다. 차우와의 인연은 그녀에게 잠시나마 따뜻한 기운을 안겨주었지만, 그조차도 그녀 안에 깊이 남은 유디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수리진은 사랑에 있어서 항상 주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더욱 고독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랑을 구걸하지 않았고, 그저 상대가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슬픔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침묵 속에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습니다. 결국 그녀는 사랑을 이룰 수 없었고, 유디를 이해하려 했던 만큼 자신을 놓아버린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3) 차우 – 말하지 못한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남자

차우는 수리진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 마음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고, 수리진이 힘들 때 말없이 곁에 머물며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조용한 경찰이었지만, 감정의 깊이는 누구보다도 깊었습니다. 그가 유디와 달랐던 점은, 누군가의 사랑을 바라고 집착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고, 조심스러웠고, 끝내는 말없이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우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대방이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해주는 사람이었고, 말보다 마음이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이기려 하지 않았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그는 수리진의 기억 속에, 그리고 관객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도, 그의 눈빛과 걸음걸이만으로도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4. 총평 

영화 《아비정전》을 보고 나면 마음속에 남는 것은 줄거리도 아니고 명확한 메시지도 아닙니다. 오히려 잘 기억나지 않는 말들, 어딘가 멍하니 바라보던 눈빛, 대사 없이 흘러가는 정적의 시간들이 오래 남습니다. 그건 이야기의 선명함이 아니라 감정의 흐림이 만들어내는 힘이었고, 왕가위 감독이 그려낸 이 영화는 명확하지 않기에 더 깊이 들어오는 사랑의 단상 같았습니다. 이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목표보다, 무엇을 남기겠다는 감각으로 만들어진 듯했습니다. 그래서 보고 나면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말 대신 마음에 오래 머무는 잔상이 생겨납니다.

왕가위는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보다 인물의 감정 상태에 집중합니다. 시간은 선형으로 흘러가지 않고, 관계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명확한 플롯을 기대했다면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삶이란 항상 그렇게 명확한 결말을 주지 않으며, 사랑이란 언제나 확실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 《아비정전》은 그런 모호함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영화였습니다. 삶에서 무엇을 정의 내리려 하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려는 태도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유디가 말했던 그 1분, 누군가의 인생에서 아주 작게 흘러간 듯 보이는 순간이 사실은 어떤 사람에게는 전 생애를 뒤흔드는 기억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순간을 자주 지나칩니다. 놓치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사랑, 혹은 그 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끝내 닿지 못해버린 슬픔. 이 영화는 그렇게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회한을 남기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회한은 묘하게 따뜻한 온기를 지녔습니다. 그 누구도 악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명확한 잘못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랑이 엇갈렸고, 마음이 어긋났으며, 시간이 흘렀을 뿐입니다.

장국영이 연기한 유디는 단순히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대의 정서를 대표하는 인물로 존재했습니다. 겉으로는 자유롭고 냉소적이지만, 속으로는 외롭고 불안한 청춘. 그는 사랑을 몰라서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멀어진 사람입니다. 그의 모습은 마치 누군가의 청춘과 닮아 있었고, 누구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그림자였을지도 모릅니다. 유디의 뒷모습은 세련되고 쓸쓸했으며, 바로 그 점이 《아비정전》이라는 영화 전체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연출은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그의 스타일을 확립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가 만들어낸 공간은 감정의 온도에 따라 색이 달라졌고, 화면의 구도는 마치 인물들이 세상에 반쯤만 발을 디딘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시간에 머무는 듯했고, 대화는 이어지지 않으며, 감정은 교차하지 않은 채 흐르기만 했습니다. 음악은 상황을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정서를 감싸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마치 오래된 팝송이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이 영화의 음악들은 하나의 추억이 되어 관객의 마음에 남습니다.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리듬과 구성을 지녔고, 지금 보아도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낯섦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진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전통적인 플롯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공허함으로 남을 수 있지만, 그 공허함 속에서 삶의 한 단면을 본 사람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진짜 영화가 되는 순간입니다. 왕가위는 이 영화를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이 어떤 기분인지를 보여주었고, 우리가 그 감정에 반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비정전》은 해석이 아닌 체험의 영화로 기억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남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등장합니다. 그는 누구인지,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 하나로 이 영화는 열린 결말을 넘어, 다음 이야기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습니다. 마치 현실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처럼,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끝났지만, 여운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여운이 관객 개개인의 기억과 감정 속에서 계속해서 자라나며, 각자의 인생 속에서 다시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비정전》은 한 번의 감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고,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었을 때, 혹은 사랑을 놓친 적 있는 과거를 돌아볼 때 문득 생각나는 영화입니다. 그때 다시 꺼내 보면, 이 영화는 그제야 완성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명작의 힘이 아닐까요. 《아비정전》은 끝내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로 가득했지만, 그 침묵은 너무도 풍성한 울림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 울림을 안고, 각자의 정전 속을 조용히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